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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정신건강복지법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

[가작] 트러블 메이커의 꼬리 떼기

  • 작성일2017-07-14 10:25
  • 조회수273
  • 수상자송O숙

<트러블 메이커의 꼬리 떼기>

앗, 역한 악취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뒤를 돌아보고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출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겨울에도 그와 한 공간에 있으려면 창문이나 문을 열고 있어야 했다. 그에게 배어있는 냄새는 어느 공간이든 삽시간에 자신의 냄새로 바꿔버리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 감았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떡진 머리, 땟국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옷차림, 구부정한 자세만으로도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감출 수 없는 그에게서 새어나오는 악취. 누구라도 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그 주변을 피하고 싶은 악취였다.

그는 2015년 여름에 내가 소속된 부서로 부서변경을 했다. 2014년 3월 18일부터 센터를 이용하기 시작한 회원이었는데‘그가 이 정도로 자기관리가 안 되는 회원이었나?’싶을 정도로 그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갔다. 회원의 개인 자료를 통해 집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락없이 노숙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는 센터를 이용한 뒤에도 해마다 몇 개월씩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약물관리와 자기관리가 되지 않는 회원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약물을 복용하며 외래진료도 늦추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왜 저 정도로 자기 관리가 되지 않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궁금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반복적으로 센터에서 샤워를 할 수 있도록 권유했고 그러는 사이에 그와 나의 계절은 가을, 겨울로 변하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서 그에게서는 더 심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50대 초반의 미혼 남성으로 치매를 앓고 있는 80대의 아버지와 한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가끔씩 남동생이 집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 동생들과의 교류는 전화 통화 정도가 전부라고 했다. 아버지의 치매가 점점 심해지자 얼마 전 동생들이 결정해 2015년 12월에 아버지를 치매요양병원에 모셨고 지금은 혼자서 생활하고 있어 외로움이 제일 힘들다고 했다. 그 동안의 생활에서 단순히 샤워와 세탁을 권하는 것의 한계를 알게 된 나는 그와 함께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합의한 후 눈이 많이 내린 2016년 1월 13일(수)에 그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항상 그에게서 나는 익숙한 악취가 우리를 휘감았다. 오후 5시가 넘어 어스름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었지만 눈앞을 밝힐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세 미납으로 전기가 차단된 것인지 형광등의 수명이 다해 그런 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를 따라 신을 신은 채 미로를 통과하듯 그의 집 여기저기를 들여다보았다. 큰 방 1개, 작은 방 1개에 화장실 겸 욕실 1개, 부엌 겸 거실 공간이 있는 13평 남짓의 다가구주택의 1층이 그의 주거지였다. 하지만 한 사람만 간신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 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로 집 안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작은 방에 놓인 매트리스 위에서 전기장판을 깔고 쉰내가 풀풀 나는 이불을 덮고 그는 생활하고 있었다. 큰 방은 발을 들일 수도 없을 정도로 짐이 가득 차 있었고 화장실 변기는 아버지가 무엇을 쑤셔 넣어 사용하지 못한지 벌써 수개월이 되었다고 했고 세탁기와 냉장고는 사용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 집에서 도보로 약 6~7분 거리에 위치한 동네 교회의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하루의 끼니는 센터에서의 점심 식사가 유일하기 때문에 센터의 식사는 자신에겐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던 그의 이야기가 다시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새어나오던 악취를 개인의 증상관리 문제로만 밀어두었던 나의 무지함과 나태함, 그에 대한 선입견이 뒤섞여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고물상을 하며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함으로 자녀 넷을 키워냈다고 한다.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명민했던 그는 대한민국의 수재들만 간다는 대학에 당당히 합격을 했고 아버지와 가족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시위를 하던 그는 시위 중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 사건은 그에게 친구 목숨에 대한 빚진 자의 부담과 죄책감을 남겼다고 한다. 얼마 후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점점 그를 고립시켰고 급기야 정신분열병이라는 진단명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되는 환청과 마음의 짐을 감당하며 살아내야만 했다. 아버지의 치매는 가족들이 알아차리기 수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평생 고물상을 해 온 아버지였기에 집 안에 잡동사니가 하나, 둘 늘어나도 대수롭게 여기지 못했다고 한다. 가져온 물건들을 품목별로 분류해서 잘 정리해두었고 효용성이 적어보이는 물건은 그가 아버지 몰래 하나씩 내다 놓아 생활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아버지는 밤이면 온 동네를 돌며 집 밖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집 안에 쌓아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결국엔 사람 대신 쓰레기들이 온통 공간을 차지하는 지금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말했다. 날은 추웠고 오르막길에 위치한 그의 집 앞 길은 미끄러웠다. 그는 겨울 동안 추위를 피해 따뜻하고 깨끗한 곳에서 편안하게 생활하고 싶다며 2016년 1월 15일(금)에 입원을 했다. 당시 그는 입원을 고려해야할 상황이 아니었으나 입원을 결정한 그를 나는 말릴 수가 없었다.

2016년 4월에 그는 퇴원을 했다. 그가 거주하고 있는 관악구 서림동주민센터에는 그 동안 그의 집과 관련된 민원이 수도 없이 접수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센터에서 그의 집 청소를 지원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동료들 중에서 그의 집 상황을 들은 몇몇 회원들이 자원해 청소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회복무요원과 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로 팀을 구성해 2016년 5월 17(화)일에 1차 청소를 시작했다. 사회복지법인 한울정신건강복지재단 산하 한울주거생활지원센터의 연계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인원의 식사비와 소정의 자원봉사자 활동비가 지원되었다. 그리고 서림동주민센터의 소개로 한국장애인정보화협회의 김광선 관악구 지회장을 만나게 되었고 김광선 회장과 관악구 장애인단체연합회와 함께 2016년 5월 26일(목)에 2차 청소를 진행했다. 청소를 할 때 이웃주민들도 짐을 나르는 일을 도와주었고 옆집에서는 차가운 음료를 대접했다. 서림동주민센터에서도 폐기물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 수거를 위해 차량을 지원해 주었다. 김광선 지회장은 해마다‘함께 하는 은준영의 러브하우스’라는 사업을 통해 관악구 관내에 위치한 주거 환경이 열악한 가정의 청소지원 및 리모델링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2016년 5월 29일(일)에 러브하우스 사업 후원으로 그의 집 도배·장판·변기·씽크대 교체 및 전기공사가 무상으로 진행되었다. 언제 쓰레기가 있었는지 싶을 정도로 그의 집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자신에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생겼다며 고마워했다. 주민센터에도 직접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은 덜어내는 순간이었다. 나 혼자서는 절대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묵묵히 악취와 먼지를 견디며 노력봉사를 한 자원봉사자들과 여러 단체의 자원연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팀을 꾸리고 일을 진행하면서 각 단체들과의 소통은 전적으로 사회복지사의 몫이었다. 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서 주어진 업무를 하면서 하루에 몇 번씩 주민센터 담당자와 다른 단체들과 연락하며 소통해 일정을 조율하고 상의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담당자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려야 했고 기관의 일정과 단체들의 일정을 조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당장 서비스가 필요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청소가 지연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의 민원이 폭등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경우처럼 주거상황이 나빠지는 경우, 자신의 증상과 상관없이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병원 입원 외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도 그를 통해 알게 된 정신보건시스템의 현실이었다.

정신과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고려할 때 퇴원 이후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경제력, 주거, 활용 자원 등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겠지만 지역에서 터전을 잡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절실한 것은 주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단순히 집만 주어진다고 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생각된다. 임대주택 거주를 지원하던 SH 공사에서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주변 주민의 끊임없는 민원이 발생하는 어려움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어려움을 계속 감수해 왔다고 한다. 그 동안 SH 주거복지상담사들은 단순히 신고접수 외에는 입주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고 정신질환에 대한 무지로 인한 두려움이 점점 커져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개별사례지원 시스템을 도입해 지원하는 서비스를 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업진행을 통해 두드러진 성과로는 서비스를 이용했던 이용자들이 지역에서 또 다른 지지체계를 경험하며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지역에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민원도 해소되었다고 한다. SH공공임대주택의 사례처럼 정신질환자의 지역사회 정착을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며 일시적으로라도 이용할 수 있는 개별사례지원 서비스가 확대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지역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여러 자원들을 연계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조율해 주는 전달체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입원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그의 경우처럼 입원 대신 일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 마련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집을 정리하며 그동안 나는 그를 볼 때 그의 삶의 어려움을 보려는 마음보다는 정신질환자라는 꼬리표에 눈이 가리어져 정신과적 어려움으로만 단정 짓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게 자리 잡고 있던 선입견과 무지로 인한 선 가르기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늦었지만 그에게 사과를 했다. 그는 괜찮다며 웃었다. 이 일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가면을 쓴 채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척하며 근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선입견을 모두 내몰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순간순간 나의 선입견과 무지를 직면하고 있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에 대해 모른척하거나 아닌척하기보다는 궁금해 하려 하고 바로바로 사과하려고 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내가 사례 관리해야 하는 대상자가 아니라 오늘도 치열하게 자신들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나의 이웃이자 든든한 동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괜찮다며 웃어주었던 그처럼 우리 모두 괜찮다며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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