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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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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가족도 믿지 않았던 신씨의 지역사회 적응기

  • 작성일2017-07-14 10:17
  • 조회수332
  • 수상자박O미

<가족도 믿지 않았던 신씨의 지역사회 적응기>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5년, 나는 정신보건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부산의 한 정신병원에서 수련을 받게 되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받자마다 시작된 수련과정에서 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부터 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임의로 ‘신씨’로 부르고자 한다).

‘신씨’는 40대 중반의 미혼 남성이었다. 말끔하고 순해 보이는 외모에 말수는 적었고, 주어진 일은 묵묵히 임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식사를 마치면 늘 복도를 오가며 도보운동을 하였다. 인사를 건네면 옅은 미소와 작은 목소리로 화답을 하였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고,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결코 다가오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것을 스스로 챙겨하는 야무진 성격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법이 없었고, 나 또한 별 다른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묵묵히 수련을 받던 나는 그해 10월 입사를 하게 되었다. 수련생의 입장과 직원의 입장은 많이 다르게 다가왔다. 병원에 입원중인 환자 및 가족과 주기적으로 면담을 하여야 하였고, 프로그램 진행도 하여야 했지만 그는 나의 담당이 아니었다. 늘 프로그램이나 병실에서 뵐 뿐 면담실에서, 혹은 우연히라도 대화를 나누는 일도 드물었다.

정신보건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직장생활을 유지하던 중 3년의 생활이 흘렀고, 나는 새로운 기회가 닿아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사회복지 현장에서 9년 8개월을 일한 후 14개월의 휴식기간을 가졌다. 충분한 쉼의 시간을 가진 후 2016년 9월 나는 정신병원이 아닌 지역사회의 사회복귀시설에서 새로운 직장생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신병원에서만 약 9년간 일하였고, 나에게 뭔가 새로운 변화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장에서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나의 첫 직장이었던 00정신병원에서 한 정신보건사회복지사로부터 입소문의 전화가 왔다. 입원중인 한 환자분이 계신데 퇴원 후 생활할 곳이 마땅치 않아 입소시설을 알아보던 중 본 기관에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면담 일정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면담일이 되었다. 입소상담을 위해 여동생 3명과 방문한 분은 다름 아닌 ‘신씨’였다. 신씨를 보자마자 “안녕하세요. 신씨. 혹시 저 기억하시겠어요? 저 정신보건사회복지사 박수미입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신씨는 잠시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기억이 난 듯 “아 박수미 선생님이시네요. 기억이 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었다. 이렇게 그와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었다.

반가운 마음을 안고 가족과 초기면담에 실시하였다. 본 시설에서 함께 생활할지도 모르는 분이기에 기본적인 면담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신씨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현재 남아있는 가족은 여동생 3명이 전부인데 여동생들로부터 듣는 신씨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충격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신씨는 성실하고, 순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동생들이 기억하는 신씨는 달랐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신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장남이라는 이유로 여동생들과 다르게 좋은 대우와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러던 중 부친이 사망하면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고, 형편이 어려워졌다. 여동생들은 신씨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고, 그에 대해 말하길 “오빠는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어릴 때 오빠 때문에 내가 원하는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했는데 이제는 병이 나서 돌봐줘야 하네요. 나도 지금 이혼 준비 중이고, 몸도 마음도 힘든데 언제까지 오빠를 돌봐야 할까요?”라고 이야기하며 신씨에게 “오빠. 이제는 오빠가 알아서 해야 돼. 오빠 입원중일 때 500만원 정도 수급비를 모아놨으니까 여기서 3년 뒤에 퇴소하더라도 오빠가 그 돈으로 알아서 사는거야. 알았지?”

신씨는 00정신병원에서 무려 16년간 입원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외출이나 외박을 다녀온 적은 있지만 한 번도 퇴원하지 않았고, 이번이 첫 퇴원이라고 하였다. 그 전에도 요양원에서 오랜 시간을 지냈었다고 이야기 하였다.

마음이 아팠다. 지난 16년간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가. 나는 여러 직장을 다녔고,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고, 은행에는 ATM기가 설치되고, 버스와 지하철은 교통카드를 이용한다. 정신병이 없는 나도 사회와 고립된 곳에서 단 1년이라도 갇힌 생활을 하고 사회에 나오면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정신질환을 알고 있는 환자가 무려 16년간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니.

그러나 더 마음이 아팠던 것은 신씨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지만 여동생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모나 자식도 아닌 오빠의 보호자 역할을 20년가량 해오고 있는 신씨의 여동생들. “만약 나의 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면, 그래서 내가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면 잘 할 수 있을까? 20년이라는 세월을 떠나지 않고 지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여동생들은 돌아가고 신씨의 입소가 결정되었다. 말이 16년이지 이전 요양원 생활까지 합하면 20년 이상 사회와 단절된 채 생활한 셈이다. 그러나 특유의 말끔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은 변함이 없었다. 거의 10여년 만에 재회를 한 것임에도 말이다. 목소리는 여전히 작고 떨렸다. 그러나 눈빛은 살아있었다.

본 사회복귀시설에 수급자가 입소를 할 경우 회비는 없지만 개인이 받는 수급비 또한 없다. 시설수급으로 자격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여동생들은 용돈을 보내줄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딱 잘라 말하였다. 다행히 신씨는 정신장애 2급이었고 약 20만원 정도의 장애수당이 나왔다. 감사하게도 여동생들이 신씨가 입원중인 동안 수급비를 모아주었고, 그 돈으로 영구임대아파트를 신청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신씨의 여동생들은 그 동안 보호자 역할을 하며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신씨와 관련된 부분은 센터에서 지원해주길 바랬다. 한 달에 한번 있는 ‘집에 가는 날’에도 신씨는 여동생들의 집이 아닌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가정을 이룬 여동생들과 생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신씨는 너무 오랜 기간 세상과 단절되었고, 심지어 외래진료를 받아야 하지만 찾아가는 방법을 몰랐다. 00정신병원에 외래진료를 받기 위해 담당자가 4개월 동안 동행하여야 했다. 또한 은행 ATM 사용을 몰라 3번을 동행하여 설명하였다. 모른 것을 새로워하셨지만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천천히 배워나갔다.

그런 신씨에게 전환점이 생겼다. 구청에서 ‘장애인일자리사업’을 진행하였고, 신씨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2017년 1월부터 신씨는 하루 4시간 시간제 근로를 하며 약 65만원의 급여을 받는다. 이것은 기회일 수밖에 없다. 시설에 입소중인 자에 한하여 ‘자립적립금’이라고 해서 퇴소 후 자립생활에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신씨의 급여에서 공제금액을 뺀 70%를 적립하는 조건으로 시설 입소기간 동안 수급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 신씨는 매달 50만원을 적금한다. 최소한의 용돈을 사용한다. 결코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는다.

여동생들과 신씨의 주치의 또한 그의 취업에 놀라는 눈치다. 물론 1년의 단기 계약직이기는 하지만 제법 자신감이 붙은 표정이고, 미소가 만연하다. 직업생활을 경험함으로써 그에게는 많은 기회가 열린 것이다.

정신보건사회복지사로써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하며 신씨와 같은 분을 보면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내가 도운 것은 매우 적다. 그저 국가의 제도와 취업정보를 알려줬을 뿐이다. 그러한 제도와 정보를 제공해 줄 때 귀 기울여 듣고,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다름 아닌 ‘신씨’자신이다.

정신과에서 “환자는 언제나 옳다.”는 말이 있다. 그가 호소하는 어떠한 증상도 그에게는 진실이기에 우리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환자가 좋아지는 요인은 치료진의 노력이 아닌 환자 본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손등이 찢어진 환자에게 아무리 좋은 치료진이 처치를 해준다 하더라도 환자가 상처관리를 하지 않으면 결국 다시 덧나고 말 것이다.”라는 수퍼바이저의 말씀이 기억난다.

신씨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고, 건강해지기 위해, 정신질환으로부터 회복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하며, 좋은 정보를 받아들일 줄 알고, 또 스스로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결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사회복귀시설에서의 남은 기간 동안 자립적립금을 모으고, 퇴소 후에는 부산의 어느 지역에서, 어떤 주거지에서 생활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신씨의 나이는 60세이지만 인생의 2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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