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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정신건강복지법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

[가작] 창공을 향해

  • 작성일2017-07-14 10:11
  • 조회수266
  • 수상자김O집

<창공을 향해>

첫 문장을 쓰는 것이 어렵고 아른거린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나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인데 한 글자, 한 글자 쓰기가 매우 조심스럽다. 그동안 나는 나에 대해 나의 생활, 나의 직업 등을 물을 때마다 머뭇거리며 일관했다. 그 누구도 차가운 자물쇠가 잠긴 나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었다. 나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는 때 묻은 담요를 덮고 화려한 포장지를 두른 듯 남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얼마의 재산을 모았고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 안타까운 합리화인지 무한한 상상의 망상인지 나 조차도 나를 속였다.

그러기까지의 과정을 언급하면 200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거울을 보며 나는 내 어깨가 휘었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외부에 나갈 때는 뒤에서 누군가 수군대고 나를 지목한다는 생각에 등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그 생각에 다수의 정형외과에 다니며 휜 어깨에 대해 의논하곤 했다. 모두 정상이라는 대답에 나는 ‘이 병원도 돌팔이구나’라고 여겼다. 그렇게 시나므로 나의 병세는 심해졌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누구나 그렇게 할 대입준비를 안하고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며 바깥과 단절된 상태로 지냈다. 나의 이런 기행 때문에 어머니와 자연히 사이가 멀어졌고, 20살이 되던 해 집을 나와 고시원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대개의 필부들은 금전적 요소에 유순해지는 편이다. 은둔생활을 하면서 새벽녘에 모텔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륜의 현장을 보며 청소하고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갔다. 숙소비를 내고 나면 물질적인 풍요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당장 식사를 할 돈도 없었다. 고시원에서 제공되는 밥 이외에는 반찬을 따로 제공하지 않아서 장류를 반찬 삼아 먹었고, 영양이 부족해서인지 걸음도 휘청거리며 걸었다. 일하면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려 벽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았다. 사실 가장 큰 망상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보면 내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밖에 다닐 때는 항상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땡볕인 여름에도 우산을 쓰고 다녔다. 나를 아는 모두 어머니, 친구들을 피하며 한편으로 그들의 미니 홈페이지에 남긴 나에 대한 언급들 ‘이 녀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고싶다’는 글을 보며 한편으로는 고맙고 이렇게 살아가는 내가 미웠다. 그렇게 8개월 뒤 병무청에 남긴 고시원 전화번호로 어머니가 알아채고 고시원에 찾아왔다. 그리고 정신과 병원에 강제입원을 했다.

마구 성내며 날뛰었지만 보호사들에게 제압당하고 따끔한 피하바늘이 살 속을 파고들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이후 이름도 용도도 쉽사리 집작할 수 없는 약을 복용해야 했고, 많은 시간들을 수면으로 보냈다. 이후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상태는 점점 호전되었다. 은둔생활을 하며 연락이 끊긴 친구들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병은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망상은 더욱 심해졌다. 증상이 미미했던 강박증, 계획을 세워서 코팅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나를 엄습해오고 괴롭혔다. 다른 사람들은 강박증의 행동을 보고 뭐 저렇게 시시한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느냐 라고 하겠지만 정말 당사자 말고는 창살 없는 감옥에 살고 있는 느낌은 모를 것이다 생각했다.

혹자는 나에게 의미 없는 계획을 세운다고 그만 두라고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반격한다. ‘향해하는 배가 나침반 없이 가는 것과 계획 없이 아무 목적 없이 사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낮에는 따듯한 춘풍이 분다. 나는 홀로 베란다에서 행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문득 홀로 있다는 외로움에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며 침대에서 누워만 있었다. 약조차도 마음의 병이 깊어서 회복을 꿈꿀 수 없도록 나를 죄어왔다. 병증은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오고 어머니는 나를 지역사회시설인 중랑한울을 이용해보자고 설득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중랑한울의 첫 인상은 약간 낙후된 곳 같아 보였다. 그리고 느닷없이 나에게 빗자루를 주며 청소를 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병을 고치러 온 것이지 식모살이를 하려고 온 줄 아냐고 묻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온갖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늦잠도 잘 수 없고, 돌아오면 매일 불안함에 떨어야했다. 주치의에게도 중랑한울을 두 달만 이용하고 그만둔다고 못 박아 두었다. 절대로 시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겠다. 부정적인 시선으로 시설을 다니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이주일 정도 지나니 팀원들의 이름을 자연스레 하나 둘씩 외우게 되었다. 여전히 말을 할 땐 땅을 보며 말했다. 그 무렵 강박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한 회원이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봐주었다. 고마웠다. 나는 그분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는데, 서서히 굳힌 나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벚꽃은 아름답고 나무는 녹음을 실감케 했다. 그 이후 중랑한울에 있는 시간만큼은 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강박증과 망상 불안함에 시달렸다. 아직 나는 불완전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관심어린 시선이 두렵기도 했다. 약을 복용해도 나아지긴 커녕 오히려 증세가 심해지고 어느덧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염세주의자가 되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의 병증을 알리고 싶었지만 사회적 편견과 인식 때문에 쉽사리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웠다. 언제쯤 이 병에 대한 인식이 나아질까? 뉴스에는 왜 이렇게 정신장애인들의 끔찍한 범죄를 자행하는지 사회가 우리들은 단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기 보다 마음이 조금 힘든 사람으로 여겼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편견을 벗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시민의 역할에 동참하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있다. 그리고 중 고등학교에서도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에 대한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인간으로 생각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시설에 가고 집에 가서 다시 힘들어 하면서 언제나 시간이 빨리 지나가 어머니가 퇴근하여 돌아왔으면 하는 일이 빈번하다. 여전히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버스도 지하철도 쉽사리 혼자 타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회복의 가능성을 믿어 보고 싶다. 날은 따듯하고 구름은 파란 미소를 지어주고 있다. 밖은 달라지지 않았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올 것이고 여름이 오면 가을이, 가을이 오면 겨울이 올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달라지는 것은 도태된 나다. 햇살은 여전히 나를 비추고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 들었다. 우애와 고마움 말이다. 회복의 희망을 그렇게 다시 생각하며 한번 하늘을 응시해보았다. 청명한 하늘에는 햇살이 여전히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여전히......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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